청해이씨 대종회
사적
사당 / 유적 / 치제문
祠堂.影堂(사당 또는 영당)
사당 또는 영당은 나라에 큰 공훈이 있어 이름이 높은 사람의 畵像(화상)이나 位牌(위패)를 모셔둔 곳이 사당영전이다.
영원이 사당에 모시기를 나라에서 허락한 신위를 不遷之位(불천지위)라한다.
우리 선조로는 시조 청해백의 신위와 청흥부원군 충장공의 신위를 不遷之位라 한다.
전국에 사당은 아래와 같다.
- 함경남도 신북청읍 안곡리 始祖靑海伯祠堂(시조청해백사당)
太宗이 忠烈廟(충렬묘)라 賜額(사액)하였다. 이곳에는 청해사 서원과 청해백 능소가 있다. 청해백의 원 사당이다.
- 수원: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가수리 始祖靑海伯祠堂(시조청해백사당)
영조 22년(1746년) 수원 종가에서 영당을 세우고 신위와 영정을 봉안하였다. 역대 조선왕이 제관을 보내어 祭享(제향)하였다. 6.25전쟁 중에 전소되어 신축하고 1973년도에 개수하였다.
- 경기도 남양주군 건진읍 용중리 하독정 祠堂
독정종가에서 영당을 세우고 시조의 신위와 영당을 봉안하고 매년 3월 135일 제향하고 있다. 철종 2년(1851년)에 화재로 소시된 영당을 개축하고 을축년(1949년) 3월에 개축하였으나 그 후 퇴락하여 종손 희영이 학연 씨와 종인들의 부역으로 1977년에 신축하였다. 시조 청해백의 2子인 武厚公 和永(무후공 화영)의 신위와 영정도 봉안하였다.
- 경기도 포천군 창수면 추동리 祠堂-靑海伯(청해백)과 忠壯公 重老(충장공 중로)祠堂
무후공 제6자 후손 8세 重老(중로) 청흥부원군 충장공의 민충사에서 청해백의 영정을 모시고 충장공 祭日(제일)에 제향을 받들고 있다.
- 황해도 봉산군 서호면
정조 22년(1798년) 황해도 종인들이 시조 청해백의 묘소와 청해사 영당 및 서원이 북청에 있어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수원. 양주. 포천. 고창의 예를 볻받아 영당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사 봉안하고 춘추로 제향을 받들었다.
- 평남 양덕군 쌍용면 용연리(현 용전리) 始祖靑海伯祠堂(시조청해백사당)
청해이씨는 평남 양덕군 大姓中에 하나이다. 철종 14년(1863년)에 북청 영당의 규모와 같은 영당과 서원을 건립하고 영정을 모사 봉안하고 춘추로 제사를 올렸다. 평남 양덕군 출신으로 건국대 교수이셨던 제11대 대종회 회장을 역임한 壹球 선생( 제18, 19대 대종회 회장을 역임한 서울대 수의과 대학 명예교수인 영순 선생의 선친)이 미국 여권으로 1990년 9월에 고향인 평남 양덕군을 방문하여 6대조 世蕃(세번)의 산소가 있고 청해백의 影堂이 있는 곳을 찾아 갔으나 영당도 비석도 없어지고 족보도 보존되지 않았고 영정만 종원이 보관하고 있어 사진을 찍어 갖고 왔었다.
宗墓配享(종묘 배향)
태종 8년(1408년) 5월에 태상왕 이태조가 승하하고 3년상을 마친 후 종묘에 테조의 신위를 봉안할 때 태종은 영의정 하륜과 그 외 중신들과 회합하고 이태조의 배향할 공신을 선정하였다. 이때 태종은 청해백은 개국원종공신일 뿐 아니라 태조대왕과 의형제를 맺고 한평생 생사고락을 같이한 분이고 또한 개국에 절대적인 공훈이 있는 원훈공신이므로 前列(전열)에 특별히 선정하여야 한다고 하명하여 지금까지 종묘에 배향하고 있다.
종묘에 배향함과 아울러 이태조의 건원릉, 태종대왕이 헌릉, 정종대왕의 제릉 등 세릉의 신도비에 청해백은 객국공신, 정사공신, 좌명공신으로 명각되어 있어 3대 왕조에 걸쳐 청해백의 공훈을 불후의 공적으로 기명하고 있어 위 능을 참배하는 사람들에게 청해백을 추모하게 하였다. 종묘배향 축문을 아래와 같다.
宗墓配享 祝文(종묘배향 축문)
勳蓋海東 緖遺朧西 百世如左 薰고長捿(훈개해동 서유농서 백세여좌 훈고장서)
[공훈은 동쪽나라에서 제일이요 계통은 농서의 후예로다. 영구한 세월을 한결같이 香火(향화-향불)를 받들어 길이 추모하리다]
주) 緖遺朧西(서유농서) : 계통은 ‘농서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어 청해백이 중국에서 귀화한 인물로 알려져 있어 나라에서도 축문에 출신 지역을 중국의 농서로 기록한 것으로 보여진다.
농서는 현재 중국 감숙성 臨洮(임조)에 있다.
遺跡(유적)
1. 靑海伯 陵(청해백 능)
함경남도 신북청읍 안곡리 별안대에 있다. 이곳에는 청해백의 사당과 서원이 있다. 산수가 청아하고 풍경이 좋은 별안대에 위치하고 있으며 좌향은 갑좌경향이다. 능소의 모양은 왕능처럼 꾸며져 있어서 사방둘레에 수석을 두었으며 서남쪽에 돌로 만든 함이 있는데 함 머리에는 구름과 용의 머리가 그려져 있고 그 함에는 청해백이 돌아가셔서 시체를 목욕시킨 물을 담아두었는데 그 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고 한다.
2. 別雁臺(별안대)
1398년 1, 2차 왕자의 난으로 이태조가 고향 함흥 궁으로 하야하고 청해백은 고향 박청사(현 북청)으로 돌아왔다. 별안대는 북청부에서 동쪽으로 약 20리쯤 되는 양가면 안곡에 잇으며 이곳에서 청해백은 은거하며 별장을 짓고 연못을 파고 기러기를 기르며 산수와 자연을 사랑하며 여생을 보냈다. 기러기 길렀기 때문에 후세인들은 이곳을 별안대라 불렀고 지금도 그 연못과 터가 남아있었다고 한다.
3. 遺墟地(유허지)
청해백이 은거하며 말년에 사셨던 곳. 함남 박청사(북청의 옛 이름) 세섬리(현 서도리)이며 은거하셨던 집 동쪽에 우물을 파고 우물 동쪽에 괴하나무를 심었다. 후세인들은 괴정촌 또는 괴정리라고 불렀다. 이곳 사람들은 나라에서 청해백의 부인 함안군 부인 윤씨에게 하사한 혜안택주라는 택호를 그대로 호칭하여 이 부락을 한 떼 혜안촌으로 불렸다고 한다.
4. 괴井(정)
청해백이 현 북청군 소후면 서도리에 낙향하여 동네 중앙에 굴정하고 그 주위에 괴하나무 수십 주를 심었다. 그 후 이 우물을 괴정이라고 불렸다. 샘물 맛이 산감하며 동네 수백 호에서 이물을 존용하여도 부족함이 없었고 아무리 가물어도 수량이 감소되는 일이 없었다. 장마가 져서 동리 다른 우물이 다 탁해져도 이 괴정물 만은 깨끗하여 동네 사람들의 음용수로 상용하였다. 이 우물을 판지 600여년간 부락에는 백치 또는 불구자와 전염병이 생긴 일이 없어서 부락 사람들은 청해백의 은더이라 하며 이 우물을 장수신천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이 괴정에 얽힌 근세 實話(실화) 몇 가지를 적어 보면 다음과 같다.
- 1945년 15일 고아북을 미리 알리느 예보도 있었다고 한다. 8.15 해방 얼마 전에 괴정에서 기이한 소리가 나서 동네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는데 얼마 후에 해방이 되었다고 한다.
- 1914년 갑인년 홍수 때 1동이 전부 침수되어 동중의 우물 10여 곳이 모두 탁수로 변했지만 유독 괴정 우물만이 맑은 그대로 유지되어 동민의 갈증을 해결했다고 한다.
- 1918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국 각처에 전염병이 성행하여 사망자와 이환자가 많았고 그해 10월에 독감이 유행할 때에도 이곳 괴정 마을만 단 한 사람의 이환자도 없었다고 한다.
- 舊韓末(구한말) 청해백의 19세손 이재우 씨가 과거보러 가는 날 새벽에 괴정우물을 길어 밥을 지었더니 수수밥같은 벌거스레한 길조가 보여 수수밥을 먹고 과거를 보러 가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한다.
5. 靑海祀 書院(청해사 서원)
조선 개국 원훈공신 청해백 양렬공 이지란 공을 봉사하는 서원으로 청해백의 고향이며 능소가 잇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면 안곡리에 있다. 창건 당시에는 소박한 영당으로 충열묘라 칭하고 일명 안대사라고도 하였다. 본시 북청군 유림에서 숭정 4년(1361년) 안대사 서원을 창건하였고 숭정 기원후 267년(1624년) 조선 헌종께서 청해사라는 액을 하사하심에 청해사 서원으로 개칭하였다.
6. 三義祠(삼의사)
삼의사는 청해이씨, 전주이씨, 김령 김씨 3성의 북처입북 분파 시조를 봉안하고 후손들이 춘추로 소도원 결의를 한 선조의 의리를 추모하고 친목을 돈독히 하는 연례행사를 하는 사당이다. 한말 고종황제 광무 5년(1902년) 항명으로 함남 북청군 북청읍 동리 덩덕산록에 건립하였다. 여기에 봉안돤 삼위신은 청해백 양렬공 이지란, 전주이씨 완풍대군 이원재(이성계의 백씨), 김령김씨 익화군 충민공 김인찬이다. 전주이씨로 소도원 결의를 한 사람은 이태조이나 이태조는 군왕이기에 이태조 대신 이태조의 형님인 완풍대군 이원재로 하였다.
소도원결의는 중국의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결의를 한 것과 같다. 소도원결의를 하였을 때 文人(문인) 출신인 김인찬은 다음과 같은 盟文(맹문)을 지어 하늘에 고하고 三人이 결의를 맺었다. 맹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결의하여 한 몸이 된 우리 3인은 같은 세대에 나서 일생의 고락을 같이 하는 오직 한 마음뿐이다. 才操(재조)는 가히 3천 제자를 가진 공자를 바라보고 몸은 늙어서 강태공을 쫒겠다. 세상을 건지고 백성을 편하게 할 것은 군주의 할 일이요, 임금을 섬기고 기강을 바로잡는 것은 나의 할 일이다. 관우. 장비의 의는 지기상합하는데 있고 어찌 후세 사기에 공이 기록되기를 위함이랴”
7. 신도비명 병서(대제학 황경원 찬)
청해백 신도비에 영.정조 시대 대제학을 지낸 황경원이 청해백의 공을 기록한 비문
靑海伯襄烈李公이神道碑銘 原文의 前文지2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 추장 월로티무르(의 반란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서 청해백으로 봉하였다.
有名朝鮮國 輸忠奮義翊贊景運開 國功臣輔國崇祿大夫門下侍中贊成事同判都評議司事兼判刑曹事判義 興三軍府都節制使 靑海伯襄烈李公 神道碑銘 洪武二十有五年。康獻卽位。策輸忠奮義翊贊景運開國功臣襄烈李公。爲靑海伯。加輔國崇祿大夫
門下侍中贊成事,判刑曹事。公固辭。歸于北靑。留不返。建文二年。恭定特拜右侍中。遣承旨召之。不至。恭定猶賜功臣祿。以終其身。四年夏四月癸亥。卒于北靑。賜吊祭。輟朝二日。永樂八年。命配享康獻廟庭。公諱之蘭。字式馨。北靑人也。初諱豆蘭。姓佟氏。入國朝。賜姓李氏。曾祖浮海入元。以功封五千戶。至公皇考諱雅遠。仕女眞。官至征西大將軍。公旣貴。贈補祚功臣領議政府事。初征西在女眞時。有大星。垂于井甃。望氣者曰。此啓明也。其下必生魁傑人。已而。公生。及旣壯。爲人勇敢善騎射。
청해백 신도비문 전문 번역문
“ 홍무 25년(1392) 태조가 왕위에 올라서 양열공 청해백을 수충분의익찬개운개국공신으로 책정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문하시중찬성사 판형조사의 직책을 맡기니 公이 한사코 받지 아니하고 고향인 청해로 돌아가서 살면서 조정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건문 2년(1400)에 태종이 우시중(종1품 벼슬)을 삼고 승지를 보내서 불렀으나 역시 올라오지 아니하니 태종이 공신의 녹을 주어서 여생을 보내게 하였다. 건문 4년 임오(1402) 4월에 청해에서 영안승천하였다.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 적제를 올리고 3일간 철조하고 국사를 보지 아니하였고 영악 8년(1408)에 태조와 같이 종묘에 배향했다.
公의 諱(휘)는 之蘭(지란)이요, 자는 식형이니 청해 사람이다. 혹 말하기를 처음 성은 퉁(佟)씨요 이름은 豆蘭(두란)이다. 공민앙때 귀화하여 이씨 성을 주었다고 한다. 그 조상은 원나라에 벼슬해서 전쟁에 公을 세워 오천호를 봉했으니 그분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浮海(부해)란 분이니 公의 증조부요, 公의 아버지 諱는 雅遠(아원)이니 여진에 벼슬해서 정서대장군이 되었고 뒤에 公이 귀하게 되어서 보조공신영의정부사를 증직하였다.
이 정사공이 여진에 있을 때 큰 별의 정기가 우물로 쏟아지므로 천문 보는 이가 하는 말이 ”계명성이니 그 밑에 반드시 위인이 나리라“ 하였다. 그 뒤 얼마 안 가서 公이 탄생하여 성인이 되매 용감하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원나라 지정 연간에 이태조가 고광성을 징벌하러 갈 때에 이태조의 모친 의비 최씨의 꿈에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沂江(기강)에 가면 사냥하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 사람이 바로 임금을 도울 사람이다“ 하였다. 이때에 公이 마침 기강 상류에서 사슴 사냥을 했었다. 태조가 첫눈에 신기하게 생각하고 의형제를 맺고 정벌하러 나갈 때면 반드시 公과 같이 나갔다.
이 인연으로 公이 북청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우왕이 서쪽 지방에서 사냥할 때에 대녕에 이르러 모든 무관을 모아놓고 이천짜리 백금을 걸고 활을 쏘게 하였다. 이태조가 쏘아서 맞히니 우왕이 대단히 기뻐하였다. 공이 이태조를 풍자하여 말하기를 ”재주가 있다고 너무 자랑하지 말라“ 한즉 이태조가 그 말의 진의를 깨닫고 공의 뛰어난 지혜에 탄복했다.
몽고 승상 납합출이 수만 댁군을 이끌고 홍원으로 쳐들어왔다. 그 이튿날 합란들에서 다시 싸우게 되었는데 납합출이 진두지휘해서 태조를 범하므로 태조가 거짓 패한 체하고 쫒겨서 달아나니 납합출이 결사대를 시켜 태조를 추격해서 태조가 거의 붙들리게 되었을 때 태조가 말에서 떨어지는 체하며 뒤로 자빠지면서 납합출의 겨드랑이를 쏘고 公은 옆에서 납합출을 중간에 두고 공격하니 납합출이 활을 당겨서 정면으로 태조를 쏜즉 태조가 말안장을 딛고 일어서니 그 화살이 태조의 바지가랭이 밑으로 빠져나가고 公이 앞으로 나와 납합출에게 정면으로 충돌하니 납합출을 당하지 못 할 것을 깨닫고 도망쳐 버렸다.
왜놈이 밤에 강화도를 습격해서 부사 김인귀를 죽이고 승천부(개풍)로 들어오니 온 장안이 놀라서 갈 바를 못 찾고 우왕은 비빈을 데리고 도망치려고 대궐문 밖에 수많은 군대가 둘러싸고 있었다. 公이 태조를 따라 해풍으로부터 급히 승천으로 쫒아오니 왜놈의 날랜 당수가 백마를 타고 公의 陣을 공격하므로 公이 화살 한 대에 왜장을 쏘아 죽이니 왜놈들이 다 도망쳐 버렸다.
그 뒤 얼마 안가서 왜선 오백척이 진포로 들어와서 군과 읍을 도륙하고 불을 지르고 호남으로 들어와서 운성을 무찌르고 인월역에 진을 치고 있었다. 태조가 公에게 ”호남 천리 길에 시체가 즐비하게 깔렸으니 공은 힘차게 싸워서 이 수치스런 일을 씻어버려야 하겠다“ 하셨다.
公이 군대를 정돈하여 가지고 정산에 이르니 왜장이 활을 겨누면서 곧장 태조의 뒤를 따르므로 公이 말을 달리며 큰소리로 ”뒤를 돌아다 보라“ 하였으나 태조가 미처 돌아보지 못하는 순간에 公이 이미 활을 쏘아 왜장을 죽였다. 왜장 아지발도는 나이 겨우 15세로 용맹이 모든 장수보다 뛰어나서 왜놈들이 상장군으로 추대했다. 태조가 公에게 아지발도를 산 채로 잡으라 하니 公의 말이 ”죽이지 아니하면 반드시 사람이 많이 상한다“ 하고 정면으로 맞붙어 싸웠다.
아지발도가 두꺼운 갑옷을 입고 구리 투구로 얼굴을 가리었다. 이태조가 公에게 ”내가 저놈의 투구를 쏘아서 땅에 떨어뜨리거든 公은 그놈의 얼굴을 쏘면 아지발도를 죽일 수가 있으리라“하고 태조가 투구를 쏘아서 땅에 떨어뜨리자 公이 뒤밀쳐 아지발도를 쏘아서 죽이니 왜놈들이 모두 통곡하고 군장비도 모두 버리고 도망가 버렸다.
여진장군 호발도가 4만 병력을 이끌고 단천으로 들어왔을 때에 公이 마침 모부인의 상의 당해서 복상중에 있었다. 태조가 사람을 시켜서 公에게 청하는 말이 ”나라가 위태로우니 비록 복상중이나 나라를 위해서 호발도를 치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므로 公이 모친 영전에 통곡재배하고 바로 나섰다. 이태조가 선봉으로 삼고 웅성에서 호발도와 싸워서 크게 이기니 호발도가 도망쳐 버렸다.
태조가 말하기를 ”이두란 장군은 적을 만나서 싸울 때 가장 과감하니 참으로 명장이다“ 하였다. 단천이 평정되니 公은 다시 갑옷을 벗고 모친의 3년상을 마쳤다.
청송백심덕부가 중문령에서 왜적을 막다가 패해서 왜놈들이 토아동까지 쳐들어와 주둔하였다. 이태조가 군대를 이끌고 합란에 가서 군 중에서 가장 용감한 군사를 골라서 산속에다 매복해 두고 公은 조영규 등 백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서히 전진하니 태조가 빨리 진격하라 하므로 公이 선두에 서서 유도작전을 쓰니 왜놈이 곧바로 태조의 진으로 범해 들어왔다.
이때 태조가 거짓 패해서 복병이 이 있는 산속으로 들어가서 반격을 가하고 公은 측면에서 공격하는 찰나에 복병이 또 쏟아져 나오니 왜병이 전멸이 되어 함관령에서 우 두산까지 삼십리 사이에 시체가 즐비하게 깔렸었다.
이 일로 公의 용감한 위명이 사방에 전하여져 몽고 여러 부족들이 모두 떨면서 항복하고 왜놈들도 모두 도망쳐 오십 년 동안은 감히 다시 우리나라를 엿보지 못했다.
태조의 좌명공신 중에서도 公의 이름이 제일 높았었다. 그 뒤에 참찬문하부사 도명마사가 되어서 북방을 다스릴 때에 여진을 내 백성으로 만들려고 잘 타이르니 여진족이 모두 국민되기를 언해서 의무적으로 부역도 하고 조세를 바치고 그 후 감히 반하는 자가 없었다. 수백년 동안 머리를 풀어 흩트리고 풍속이 모두 의관지족으로 화해서 장백산부터 훈춘강까지의 천여리의 여진 땅이 우리나라 영토가 된 것은 실로 公의 功(공)이었다.
신우왕이 사신을 북원에 보내어 조공을 바치며 일조에 요동을 치기로 모의하고 태조를 도통사로 삼고 公을 원수로 삼아서 평양을 출발, 위화도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왕이 김완에게 친서를 주어 빨리 진격하도록 명령하였다.
태조가 되돌아가려고 우왕에게 건의하려 하다가 혹시 반역자로 몰릴까 염려해서 결정을 못하고 있는지라 公이 강개한 태도로 태조에게 ”자식이 아버지를 친다면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겠는가. 천하 사람에게 죄를 짓느니 보다 되돌아가서 나라와 백성을 평안하게 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한즉 태조가 그 말을 듣고 군사를 돌이켰다. 이 사실을 뒤늦게 명 천자가 알고 조서를 보내 대의를 지킨 것이 아릅답게 여겨 포창하니 비로서 나라와 백성이 모두 평안하게 살았다.
익양백 정몽주 선생이 王氏가 장차 망하게 됨을 근심해서 김진양과 같이 힘을 합해서 王氏를 붙들기로 합의하였다. 태종이 술자리를 베풀고 익양백을 청해서 같이 술을 마실 때에 익양백이 비장한 노래로 마음이 변치 아니할 것을 맹서하니 여러 장군들이 公을 보고 때려 죽여 없애라 한즉 공이 엄숙한 태도로 ”익양은 충신이야, 나 어찌 충신을 죽여 스스로 옳지 아니한 일을 할 수가 있나“하고 움직이지 아니하였다. 얼마 안가서 고려와 조영규의 무리가 익양백을 살해하고 公은 이일에 관여하지 아니했다.
태조가 건국한 즉시로 공신을 책정해서 公에게 공신의 직첩(사령장)을 내리자 公이 병을 핑계로 문 밖을 나오지 아니하니 모든 재상들이 탄복하였다. 태조가 밤에 경복궁에서 잔치를 베풀고 공신들을 청해서 즐겁게 놀 때에 태조가 광대를 시켜서 文德曲을 부르고 공에게 하는 말이 ”과인이 오늘날 이렇게 된 것은 公 등의 功일세, 한즉 公이 대답하되, “대의를 밝혀서 천명을 받았으니 전하의 덕이 높으신 때문이지 신이 무슨 공이 있사오리까” 하였다. 태조가 어느 날 근신을 보내어 公을 침전으로 불러드려서 모든 신하와 장수들 중에서 누가 착하고 못한 것을 물으니 公이 “정도전이 간사해서 반드시 제명에 못 죽으리다” 하였는데 그 뒤에 과연 정도전이 사형을 받아 죽으니 그제야 태조가 公의 탁월한 선견지명을 감탄하였다.
태종이 왕위에 올라서 公이 정도전의 간사함을 미리 판단하였다 하여서 추중병의익대정사공신청해군으로 책정하고 이 돌아감에 또 분충효절동덕좌명공신으로 책정하고 양렬의 시호를 내렸다. 公이 용모가 부인같이 아릅답고 장수가 되어서는 위엄이 천하를 진동시키며 그 대절은 누구라도 빼앗을 수가 없었다. 公이 고향인 북청으로 내려간 지 10년 만에 72세로 돌아가시고 그해 모월 모일에 북청부 동쪽 별안대 언덕에 장사 지냈다.
원부인은 함안군부인 혜안택주 윤씨로 영의정 희보의 딸이고 다음 부인은 성산군부인 곡산 강씨로 예의판서 普戴(보대)의 딸이니 바로 신덕왕비 오빠의 딸이다. 아들이 사형제다. 맏이는 화상이니 판공조사(判工曹事)요 다음은 화영(和英)이니 다음은 화미(和美)니 판 다음은 화수(和秀)이니 예조 참판(禮曹參判)을 지냈다. 고손 정호(挺豪)는 수찬으로 김안로(金安老)의 죄를 논하다 무고로 몰려죽고, 7세손 첨절제사 희당(希唐)은 선봉으로 왜노를 격퇴하다 백탑(白㙮)에서 전사하였다. 정사공신 충장공 중로(重老)는 이괄을 토벌하다 豬灘(저탄)에서 전사하였고, 희당의 아들인 삼립(三立)은 무과로 출신해서 적을 막다가 학포에서 또한 전사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公의 유풍이 아니겠는가.
공이 북방에서 태어나서 태조를 좆차 모든 장수 중에 으뜸가는 장수가 되어 전쟁을 백여 차례나 치루어서 북쪽으로는 몽고를 쫒아버리고 남쪽으로는 왜놈을 무찌르고, 여진을 회유하여 귀화하게 해서 국토 천여리를 넓히고, 또 충정과 인의를 지켜 천자를 범하지 않고 충신을 죽이지 아니하였다. 공신의 대열에서 백작까지 받았으나 자긍하지 아니하고 겸손하게 처신한 그 뜻은 소인배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승지가 왕(태종)의 조서를 받들고 부르러 갔을 때 公이 승지가 온다는 소문을 미리 듣고 절의 중을 시켜 삭발도구를 휴대하고 대기했다가 승지가 들어와서 어명을 전달하니 公이 의관을 정제하고 조서를 받은 뒤에 즉석에서 관대를 불태우고 머리를 깎고 수염을 그대로 두었으니 오호라, 公의 생각에는 이름을 숨기기 위해서였던가, 머리를 깎지 않고는 이름을 숨기지 못했던가, 백세 뒤에서 반드시 公의 뜻을 알 사람이 있으리라.
공의 후손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가 많다. 후손 경태. 경우. 익신. 지식. 세관 등이 묘소에 비를 세우기로 의논하고 나를 찾아와서 글을 청하므로 아래와 같이 새기고 쓰노라. 씩씩한 양렬공 북방에서 태어나 우리 태조를 도와서 정벌에 이름을 날렸다. 위대한 태조는 실로 하늘이 낳으셔서 사방을 오직 公만이 따랐었다. 오랑캐를 쳐서 군적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고 왜놈을 무찌러서 대장을 죽이니 그 공이 하나 둘이 아니었으며 북과 남이 모두 편하게 된 것은 실로 公의 거룩한 功이었다.
우왕이 요에게 반기를 들자 천자를 치지 못한다 하고, 포은을 죽이라 하자 충신을 어떻게 죽이랴 하고 승낙하지 아니하였으니, 公의 마음가짐은 신명이 증명하는 오직 仁과 義 뿐이다. 나라가 처음으로 세워지매 북청 한 모퉁이에 개국공신이 생겨나서 백작을 받게 되었으니 고의 짝이 없는 용맹은 싸움에는 당하는 사람이 없었으며 부귀를 급급하게 빛내지 아니하고 벼슬을 조금도 거리낌없이 내버렸다. 태종이 公의 뜻을 아름답게 생각해서 초야로 돌아간 公을 움직여 다시 벼슬자리로 돌아오도록 친서를 보내어서 북청이 진동하였으나 公이 친서를 받고 나서 관복을 불사르고 머리를 깎아서 영구히 벼슬을 사양하였다.
북산은 높고 횡수는 양양히 흘러 쉬지 않는도다, 公의 명철한 덕행을 영구히 인멸되지 않고 전하여 지리라. 태조 묘에 배향에서 그 공적이 길이 전하게 하였도다. 내가 한 폭 시를 돌에다 새겨 오는 세상에 알리노라
숭정기원후 삼 갑오(1773년) 10월 일 立
대제학 황경원
8. 송포백운
송포는 청해백이 현 북청군 서도리를 은거지로 정하 후 오리쯤 떨어진 중산맥 하단 방축산 중턱 안좌형 고개가 보여 지세로 보아 앞으로로 그 부락에 화재와 동족간 불화를 가져올 기세가 보여 이를 제압 방어하기 위해 부락과 방축산 중간에 수많은 소나무를 심어 안좌형 고개가 보이지 않게 하여 마을에 재앙을 에방하였다고 한다. 이 소나무 숲 단지를 송포라하며 단오절에는 부녀자들의 그네뛰기 장소였고 하절기에는 피서지로 동절기에는 흰눈이 소나무에 내린 모습이 백화가 송지에 만개한 형상이며 바람에 휘날릴 때는 흰 꽃이 낙화하는 것처럼 아름다웠다고 한다.
致祭文(치제문)
1. 영조대왕(22년) 치제문 병인(1746) 9월
신령님께 고합니다. 장군은 용을 받들고 봉황을 도와 북쪽에서 일어나 우리 태조를 도와 한양도읍을 세우니 이름 철권에 오르고 공훈은 한 나라를 덮어 수백 대를 지나도록 생생하도다. 이제 유상을 보니 그 정대하고 강직했던 기질이 자연 마음에 떠올라 이 글을 지어 제관을 보내 잔을 드리니 내 잔을 받아 흠향하소서
2. 영조대왕(26년) 치제문 경오(1750) 9월
하나님은 세상이 어지러워짐을 측은히 여기사 神武(신무)한 태조를 내보내고 또 영웅호걸을 탄생케 해서 날개와 깃처럼 돕게 하였다. 오직 청해백이 우리 태조가 태어날 때에 같이 태어나서 구름이 용을 쫒듯 바람이 범을 쫒듯 분발해 일어나서 달동 싸움에 납합출을 항복받고 황산싸움에서 왜장의 이마를 쏘아 뚫고 위화도에서 대의를 밝혀서 선을 돕고 악을 없애서 나라를 세워 천지에 맹서하여 성을 주고 땅을 주었다. 큰 공을 세우고 물러났으나 태조의 사당에 같이 모셔서 천만년 태조와 함께 누리게 하였다.
화상을 보고 제향의 북소리를 들으니 장군의 생각이 더욱 간절하며 수백 년 된 오늘날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니 때는 다르나 이것도 연분인가하여 선부에 명령해서 장군의 사적을 다시 기록하게 하였다. 마침 온궁으로 가는 길에 장군의 사당 앞을 지나게 되므로 장군의 위대한 공을 흠모해서 제관을 시켜 제사를 지내노라
3. 정조대왕(14년) 치제문 경무(1790) 2월
하늘이 임금을 내게 되면 도울 사람이 또한 그때를 따라서 나오게 되느니라. 태조가 창업하실 지음에 청해백이 도운 것이 바로 이것이다. 수많은 사람중에서 참다운 주인을 만나 바람과 구름이 얽히듯 정분이 친밀해서 산천을 주름잡고 칼날을 휘둘러 신무를 도와 팔도가 통일되었다.
천지에 맹서하니 둘도 없는 큰 공이다. 모든 영웅 열사가 공을 따를 사람이 어디 있나. 그 전부터 해마다 제사를 지내왔고 특히 영조대왕께서 화상을 칭찬하였고 제물을 갖추어서 제사를 지내셨다. 나도 마침 사당 동네를 지나게 되어 잠깐 기ᅟᅡᆯ을 멈추고 지나간 일을 추모하며 사신을 시켜 제사로 나의 뜻을 표하노라.
4. 정조대왕(19년) 치제문 을묘(1795) 2월
씩씩한 청해백은 개국의 원훈이다. 버들잎을 뚫을 수 있는 활 재주를 가졌고 삼군의 장수를 빼앗을 만한 용맹이 있었다. 옳은 임금을 만나서 용의 비늘과 봉의 날개와 같이 받들고 도왔다. 관북에서 태어나서 대공을 세워 이름이 사기에 기록되고 畵像은 기린각에 걸려 있도다.
믿음을 지키며 권세를 버리니 곽자의처럼 복이 많도다. 우뚝한 옛 사당이 저 언덕에 있어서 영혼은 원침을 둘러싸고 영기는 산천처럼 웅장하도다. 去年에 사당을 중수해서 이제 준공을 보게 되었기에 지나는 길에 수레를 멈추고 영웅의 기풍을 잠깐 구경하노라.
(정조대왕 즉위 19년 閏 2월 12일에 또 다시 융릉을 참배할 때 부호군 윤득규를 제관으로 삼아 청해백 사당에 치제하시다)
5) 순조대왕(4년) 치제문 갑자(1840) 9월
하늘이 때를 맞추어 영웅을 탄생시키니 고명한 재주는 일월을 흔들리며 바람과 구름을 마음대로 하여 천지를 정돈해서 개국에 세운 큰 공은 바다보다 깊고 태산보다 높아서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혁혁하여 부녀자와 아이들까지도 이름을 외게 되었다.
교외에 사당을 세워서 해마다 제사를 지내도다. 선왕께서 화상의 늠름함을 찬양하여 이미 그 공덕을 칠분이나 밝혔다. 선왕의 능침을 다녀오는 길에 추모의 마음으로 사신을 시켜서 영혼을 위로하니 흠향하소서.
(순조대왕 즉위 4년 9월 27일에 수원에 있는 아버지 정조대왕의 건릉을 참배하고 돌아오는 길에 예서좌랑 박정검을 치제관으로 삼아 청해백 사당에 치제케 하였다)
6) 순조대왕(10) 치제문 경오(1810) 12월
용이 하늘로 뛰어올라 바람과 구름을 타고 다니듯이 때를 만나 재주를 발휘해서 큰 공을 세워 이름으이 사기에 올라서 부녀자들까지도 알게 되었고 선왕께서는 화상을 찬양하는 시까지 지으셨다. 사당이 나 다니는 길 가까이 있어도 황천에서 만나기는 어려운 일이로다. 그 옛적 일을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도다. 영명한 혼령은 내 술이 맛이 없다 하지 말고 흠향하소서.
(순조대왕 즉위 10년(1810) 7월 27일 수원에 있는 선왕의 능을 참배할 때 청해백의 사당으로 제관을 보내어 치제하고자 하였으나 뒤로 미루어져서 그해 12월 15일에 예조좌랑(정6품 벼슬) 민영세를 제관으로 삼아 치제케 하였다)
7) 순조대왕(10) 치제문 경오(1810) 12월
옛날 임신년(1392)에 태조께서 하늘의 명을 받아 왕위에 오르셨다. 초년부터 태조가 천명을 받은 것을 알고 영특하고 호걸스럽게 태조를 돕기 위해 야인으로 서로 만나서 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교분이 깊었고 버들잎을 맞히는 뛰어남 궁술로 큰 공을 많이 새워서 아지발도를 죽이고 여진을 귀순시키며 의병을 일으켜 2, 3 동지와 협력해서 나라를 창건하니 천지에 맹서하여 고와 낙을 국운과 같이 해서 이름이 사기에 빛났다.
임금의 신임이 제일 두터워서 청해백에 봉하였으니 당나라의 이세적과 같고 주나라의 소공과도 같아서 기린각에 이름이 오른 영광은 천추에 빛나 있다. 대통은 끊이없ㅇ이 전해와서 개국하던 그해 임신년이 돌아왔으므로 창업하던 그때의 일을 더듬어 보니 실로 감개무량하도다. 오늘날 우리가 무궁한 복록을 누리게 된 것은 실로 창업할 때에 우리에게 튼튼한 기반을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큰 공을 세운 경은 수백 년 뒤에 태어난 우리에게 기맥이 서로 통하니 감동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남전에서 잔을 드리니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새로워지도다. 원 제사는 함경도에서 지내나, 이번 임시 제사에 대하여 영혼은 부족하다 마시고 흠향하소서.
(순조대왕 즉위 27년(1812) 7월 27일 태조 임금이 조선왕조를 창건하여 왕위에 오른 지 7회갑(420년)이 되는 기념일이다. 이에 순조임금은 이날을 맞이하여 특히 개국공신을 흠모하는 감회가 새로이 떠올라 특별담화를 한 동시에 각 정부기관으로 하여금 그 공신의 사당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케 하였다. 이때에 청해사에 치제를 맡은 예관은 이중진이었다)
8) 헌종대왕 치제문 계인(1843) 2월
태조가 하늘의 명을 받아서 처음 왕위에 오르신 거은 옛날 임신년이었다. 영웅호걸들이 때를 맞춰 태조의 보필이 되어서 여러차례 난리를 평정하였음은 한나라의 삼걸과 같도다. 누가 뭐라고 해도 오직 경은 태조의 장래를 알고 바람ㅇ에 구름 좆듯 군신이 서로 만나서 버들잎을 맞히는 특이한 궁술은 사냥할 때 미리 알게 되었고 여진을 항복받고 아지발도를 무찔러서 개가를 올리고 대의를 굳게 지켜 대업을 이루어서 화상은 기린관에 높이 걸리고 이름은 사기에 빛나서 대대로 자손이 복록을 누리고 오늘날까지 국운이 흥왕한 것은 실로 경의 위대한 공훈의 덕택을 입은 것이다. 지나는 길에 사당을 바라보니 추모하는 마음이 더욱 새로워서 사신을 시켜 잔을 드리노라.
9)철종대왕 치제문 임자(1852) 11월
신성한 태조가 대업을 이룩하심에 하늘이 원훈 청해백을 탄생하시어서 서상이나 포악처럼 충성을 다하게 하였다. 민간인으로 계실 때부터 정다운 친구로서 천산싸움에 화살 몇 개로 오랑캐의 혼을 잃어버리게 하고 운대(공신각)에 화상이 높이 결려서 사기에 이름이 실렸었다.
큰 공은 세우고 산야에 물러나서 벼슬을 탐하지 아니하고 절개를 지킨 것은 더욱 특이하고 임금 앞에서 간신이 장래를 미리 판단한 그 높은 식견은 눅라도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은혜를 베풀어서 성을 주고 작위를 높혀서 태조의 종묘에 같이 모셨고 무덤에서 금이 온다는 글자가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저승에서 혼령이 나라를 보호해서 자손 대대로 벼슬을 하여 혁혁하도다. 지나는 길에 추모하는 감화가 간절해서 사신을 시켜 잔을 드리니 흠향할지이다.
(철종임금이 즉위3년(1852) 11월 18일에 선왕처럼 수원에 있는 선대 왕의 능을 참배하러 지나는 길에 예조좌랑 금정원을 제관으로 삼아 청해백 사당에 치제케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