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이씨 대종회
선조들의
발자취
청해백 양렬공 이지란 시조의 뒤를 이어 2세인 화상, 화영, 화미, 화수 네분을 비롯하여 수많은 충신과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1. 樞密公 和尙
추밀공 화상은 청해백 이지란 시조님의 장자로 함경도 북청에서 태어났다. 조선개국공신 청해백 양렬공 이지란을 도와 고려말과 조선조 초기에 남정북벌에 공훈이 많아 조선에서는 복국숭록대부판공공사 청해군을 중국 명조에서는 추밀부사겸 예부상서의 작위를 받은 조선 개국의 원종공신이다. 공은 청해백을 닮아 용맹과 지략을 겸비한 무장이었다. 이태조와 청해백과의 관계로 늘 이태조의 아들인 방우, 방과와 가까이 지냈고 특히 조선조 3대왕이 태종 방원과 같이 조선조 건국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공이 早卒(조졸)하여 후광을 받지 못하였다. 부인은 정경부인 인동권씨로 이조개국일등공신 화산부원군 권씨의 따님이고 계비는 정경부인 동평 이씨 사재부령 이승조의 따님이시다. 아드님은 5형제를 두었고 첫째 효원, 둘째 효형 두 분 다 청해군으로 봉군 조졸하여 자손이 없으며 셋째 효적, 넷째 효장, 다섯째 효철이 있어 그 자손 중 일부가 서울 또는 경기 지방에 거주하고 그 외는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에 살고 있다.
청해백의 장. 차자에 대한 장.차의 분쟁이 조선 영조시대부터 시자하여 조선말까지 계속하여 온 관계로 청해백에 대한 기제사를 북청(추밀공의 자손)과 오산(무후공의 자손) 두 군데에 사당을 모시고 각기 장손이라 칭하고 봉제사하여 왔으나 각종 문헌을 살피고 고증한 바 추밀공이 장자이며 무후공이 차자인 것을 확인하였다. 이는 청해백 신도비, 동국여지승람 청해백편 중 자제란, 조선왕조실록 제1권 총서 23매 제7행에 “ 상왕이 그 형 방우 및 이두란의 아들 화상 등과 같이 우왕 처소로부터 탈출하여 군전에 왔다”라고 된 기록 등으로 볼 때 장자임이 확실하다. 우리 대종회에서도 이런 역사적 고증을 근거로 임오보(1762)에 화영이 장자로 되어있는 것이 오류임을 인정하게 되었다.
2. 武厚公 和英
무후공 화영은 청해백 이지란의 둘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 기골이 장대하고 늠름한 무인으로서 약관 18세부터 아버지 청해백을 따라서 낭장으로 무공을 세웠다. 무후공은 태종의 특별한 총애를 받아 태종 원년에 예조전서가 되었다. 태종 2년(1402) 청해백이 북청에서 하세하시자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아우 판윤공 화미, 예판공 화수 등 가권을 데리고 북청으로 가서 장례를 집행하였다. 이때 장자인 회상은 이미 조졸하였다.그해 11월에 안변부사 조사의가 이태조를 업고 강씨 소생 방번, 방석(1차 왕자의 난)의 원한을 갚는다는 명분으로 기병하여 철령을 넘어 남하하고 있었다. 이에 화영은 두 아우를 데리고 용전분투하여 조사의 일당을 안주. 덕천에서 패퇴시켰다. 이에 태종은 무후공을 더욱 신임하고 총애하게 되었다. 특히 아버지인 청해백의 유업인 여진족의 교화와 귀화에 노력하여 오늘날 함경도가 우리나라 땅이 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보국숭록대부(정1품) 판도총제부사, 의흥삼군부사 겸 판형조사가 되었다.
장자 효량에 이어 효정, 효온, 효검, 효양, 효강을 두었다. 묘는 서울시 도봉구 미아리에 있다가 서울시 도시계획에 의하여 잠시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가수리로 천묘하였다가 독정리 문중 이억성 어르신의 노력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하독정)으로 천묘하여 현재 독정리 문중 세장지에 모셔져 있다.
3. 判尹公 和美
판윤공 화미는 청해백의 셋째 아드님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뛰어나 아버지 청해백과 같이 비범한 무인으로서 판한성부사를 지냈다. 일찍 졸하여 무인다운 재질에 비하여 높은 벼슬에 오르지는 못하였다. 형인 무후공과 함께 조사의 난을 평정하는데 기여하였다.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 독자인 돈을 두었다. 태종대왕은 판윤공이 1,2차 왕자의 난과 조은의 난 평정에 직.간접의 공이 있고 또 선대부터 각별한 친교로 마치 형제와 같은 우애로 판윤공의 武才(무재)를 사랑하였고 또 그 충직한 성품을 믿어 건주위 사정을 탐정하게 하였다. 그러나 한창나이에 세상을 떠나 높은 벼슬에 오르지 못하고 판한성부사로 관직을 마감하였다. 청해이씨에 세보에 따르면 부인 양씨와의 사이에 독자인 돈을 두었고 돈은 돈년도정을 지냈고 묘소는 황해도 서흥군 월은동이며 후손들이 황해도지방에 산재하여 있고 봉산 서호방영당도 후손들이 건립 제향하고 있다.
4. 禮判公 和秀
예판공 화수는 청해백의 네 번째 아드님으로 그 출생과 사망연대에 대한 기록이 없다. 조은의 난에 형들과 같이 철령을 넘어오다가 반란군의 저지선을 뚫고 태종대왕의 친정군에 가담하였던 기록이 있다. 청해이씨 세보에 최종벼슬이 예조참판으로 기록되어 있다. ㄱ록에 의하면 형들과 달리 문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부인은 홍주이씨(영의정 안평부원군 문간공서의 따님)와 사이의 아드님인 孝恭(효공)은 독자로 단양군수를 지냈다.
5. 첨지중추원부사(정3품 관직) 孝溫
청해백의 孫, 무후공의 3子이다. 형제로는 효량, 효정, 효검, 효양, 효강이 있다. 1442년에 관습도감판관으로 있었다. 1460년 첨지중추원사가 되었고 1461년 왕이 베푸는 주연에 참가하고 교태전에 나가서 시식을 하는 등 공신의 자제로 많은 예우를 받았다. 묘는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무후공 독정문중 세장지에 있다.
6. 청릉군 李麟奇
청릉군 이인기(1539-1631)는 청해백의 7세손으로 학자로서 호는 松溪(송계)이다. 선조 22년(1589)에 司馬試(사마시-조선시대 생원과 진사를 뽑던 과거)에 합격하여 도회서별제를 거쳐 경안도찰방, 내자사주부, 형조좌랑에 이어 1605년에 보은현감이 되고 다시 내직으로 형조정랑(형조에 속한 정5품 벼슬)이 되었다. 이어 영덕현감을 지낸 후 인조반정 후 가평군수가 되었다가 이괄의 난에 아드님 충장공이 전사하자 벼슬을 버리고 여생을 저작활동과 제자 훈육으로 보냈다. 아드님인 충장공의 충절을 인조대왕이 특히 사랑하여 송계공에게 가선대부를 제수하고 그 후에 좌찬성 청릉군으로 추봉하였다. 송계공은 당대 학자들의 추앙을 받은 학자로서 시문을 물론 서화에도 능통하고 특히 초서는 당대 명필로 알려졌다. 아들 충장공을 늘 애석하게 생각하여 손수 화상을 그려 벽에 그려두었던 것이 현존하고 있다. 현재 충장공의 화상은 포천문중 후손들에 의해 경기도에 기중되어 보관되어있다. 저서로는 松溪集(송계집)이 있다.
7. 창렬공 希唐
창렬공 희당은 청해백의 7세손이며 추밀공의 6세손이다. 1559년 명종 10년에 북청에서 출생하였다.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이면 활쏘기와 칼 쓰는 배우기 시작하여 10여 년 만에 그 무예가 대성하여 25세에 무과에 급제 동부주부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파당으로 국정이 혼탁하여 이를 탄식하며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북청으로 돌아와 농사를 짓고 활을 쏘며 사냥을 하며 유유자적하며 보냈다. 그러던 중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 호랑이를 잡으로 산으로 들어가 호랑이를 화살로 쏘아 잡아 마을을 호난에서 구했다. 임진년에 주을혼만호가 되어 왜장 가도기요마사 부대와 세 번 맞붙어 싸워 매번 이겼다. 마지막 싸움에서 패주하는 왜군을 보며 회군하려는 중 적의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당시 공의 나이 35세였다. 의주행궁에 있던 선조대왕은 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한탄하다가 공에게 훈련원왕을 추증하고 익호를 창렬이라 하였다.
임진왜란이 평정된 후 조정에서는 공과 정문부.이붕구 등의 충렬을 길이 표창하기 위하여 북청에 창렬사를 짓고 정문을 세워 충렬의 영혼을 추모하였다.
8. 忠壯公 李重老
충장공 이중로는 1577년에 청해백의 둘째 아드님인 무후공의 제6자 효강의 6세손으로 청릉군 麟奇(인기)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났다. 자는 진지(鎭之), 호는 송계거사(松溪居士)이다.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감찰 이경(李敬)의 딸이다.
충장공은 유년시절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용력이 대담하여 나이 16세에 武科에 급제하여 다음해에 선전관이 되었고 훈련도감낭청을 거쳐 광해군 13년(1621년)에 이천부사가 되었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훈련도감낭청을 지내고 1621년(광해군 13)에 강원도 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장단부사 이서(李曙) 등과 함께 장졸을 모아 참여하였으므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錄勳)되었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하여졌다.
광해군이 강화도로 쫓겨나자 강화부윤에 임명되어 광해군을 보살피었다. 그 뒤 오위도총부부총관·훈련도정을 겸임하고, 포도대장(종2품)을 지냈다. 이때 1624년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도체찰사 이시발(李時發)과 함께 황해방어사로서 반란군을 저지하는 책임을 맡았다. 예성강 상류인 마탄(馬灘)에서 여울물을 지켜 적을 막으려는 싸움준비를 하던 중, 적의 급습으로 관군이 패할 때 우방어사 이성부(李聖符)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왕은 그가 늙은 아버지가 있음에도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하여 매우 슬퍼하였다 한다. 다행히 그의 시신은 유효걸(柳孝傑)이 전복(戰服)으로 싸서 묻고 표를 해놓았기 때문에 찾았다.
이괄의 난은 이수백(李守白) 등이 이괄의 목을 베어와서 항복함으로써 끝이 났으나, 중로의 長子 문웅(文雄)과 次子 문위가 박영신의 세 아들 지병, 지담, 지번과 합세하여 이수백이 아비를 죽인 이괄의 무리라 하여 대낮에 목을 베어 복수하였다. 이후 조정에서는 이수백을 죽인 문웅등에 대해 죄를 논하였다. 이수백을 죽인 것이 아버지를 죽인 원수에게 복수한 효심의 발로라는 주장도 있었으나 이수백은 이괄의 난에 참여는 했으나 이괄의 목을 베어 조정에 바치고 면죄를 받은 것이므로 私怨(사원)에 의한 것이라 하여 중죄를 주기로 하였으나 인조대왕은 충장공이 나라를 위하여 순절하였음을 애석하게 생각하여 그 아들들에게 중죄를 면하고 장자 문웅은 전주에, 차자 문위는 익산으로 유배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날 전남.북에 산재하여 살게 되었다. 사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고, 금천의 민충사(愍忠祠)에 배향되었다. 오늘날 포천 청해사에 청해백과 함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영정은 포천문중 후손들에 의해서 경기도에 기증되어 보관되어있다. 諡號(시호)는 충장(忠壯)이다.
9. 忠貞公 李壽民
충정공 수민은 1651년에 태어나 1724년에 졸하였다. 1676년(숙종 2)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고, 훈련원 주부·도총부도사·경력을 거쳐, 고원군수·낙안군수(樂安郡守)·장흥부사가 되었다.
1701년(숙종 27) 나주토포사(羅州討捕使)에 발탁되고 이어 우림위(羽林衛)의 사복장(司僕將)·우후(虞候) 등을 지냈다. 철산부사를 거쳐 전라좌도 수군절도사로 체배(遞拜)되어, 임기를 마친 후 선전관에 환배(還拜)되었다. 그 뒤 장단방어사를 거쳤다. 이후 전라병마절도사에 임명되고 삼도통제사(종2품 수군을 총지위하는 관직)에 승진하였다. 1719년 어영중군(御營中軍)으로 가선대부에 오르고 금군별장 겸 도총부부총관(정2품 관직)에 전직되었다가, 다시 통제사가 되었다.
1721년(경종 1) 신임사화로 노론의 대신 김창집(金昌集)이 유배도중 통영을 지나자, 이수민은 원문(院門)에 나가 인사를 하고 비장을 시켜 김창집을 호행(護行)하도록 한 것으로 소론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이어 목숨만은 구하여 제주 정의(旌義)에 유배된 지 1년 만에 그곳에서 죽었다. 1725년(영조 1)에 신원되어 용인 굴암(窟巖)으로 환장(還葬)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0. 貞敏公 李裕民
정민공 이유민은 청해백의 ㅇ세손이며, 이명로(李明老)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문주(李文柱)이다. 효종 9년(1658)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이핵(李翮)이며, 어머니는 이승효(李承孝)의 딸이다.
1696년(숙종 22)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등용되고, 병조좌랑·부안현감을 거쳐 홍주목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의 토지를 빼앗은 권문세가의 횡포를 조정에 알려 토지를 백성에게 반환하도록 하였다. 충주·의주 등 각 지방관을 지내고, 수원부사가 되어 백성을 잘 다스림으로써 왕으로부터 표리(表裏: 속과 겉의 옷감)가 하사되었다.
1714년 지평·장령·정언 등을 거쳐 1718년 승지에 이어 형조참의가 되고, 이듬해 여주목사, 뒤에 함경도병마절도사를 거쳐 1721년(경종 1) 한성부좌윤, 이어 형조참판이 되었다. 이 해 이진유(李眞儒) 등 소론에게 배척을 당하여 관직을 삭탈당하고 고향에서 은거생활을 하였다.
1725년(영조 1) 사직을 거쳐 자헌대부(資憲大夫)로 병조판서에 특진되고, 이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28년 공조판서로서 이인좌(李麟佐)의 난의 평정을 도와 왕의 신임을 받았으며, 도총관·지의금부사를 지냈다. 영조 5년(1729)에 졸하였다. 뒤에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11. 그 외 조선 功臣錄(공신록)에 오르신 先祖(선조)
1) 증 보조공신 영의정 청해부원군 諱 雅遠(아원-아라부카)
청해백의 父, 元나라에서 금패천호, 정서대장군의 벼슬을 하였다. 조선조에 증 보조공 신 영의정 청해부원군이 되었다. 청해백의 공이 크므로 그 부친에게 부원군과 영의정 을 추증한 것임
2) 寧國公臣(영국공신) 경원부사 증 訓鍊院正(훈련원정-정3품 벼슬) 희당
청해백의 장자 추밀공의 3子 효적의 5세손
3) 갑란원종공신 宣略將軍(선약장군) 諱 성남
청해백의 10세손 추밀공의 3子 효적의 8세손
4) 임란원종공신 司僕寺僉正(사복시첨정-말(馬)을 관장하는 종4품 벼슬)) 諱 호정
청해백의 10세손 추밀공의 4子 효장의 8세손
5) 임란원종공신 司僕寺僉正 諱 호걸
청해백의 10세손 추밀공의 4자 효장의 8세손 호정의 아우
6) 寧國公臣(영국공신) 조봉대부 동몽교관(증직) 諱 三立
청해백의 장자 추밀공의 3子 효적의 6세손, 희당의 3子 임진왜란 때 순절
7) 단사공신 사복시첨정 증 병조참판 諱 문주
청해백의 9세손 인기의 孫(손)
8) 영국종훈 무훈련원정 諱 창남
청해백의 9세손 무후공 6子 효강의 7세손
13. 문, 무과 급제자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8명, 무과 급제자 16명을 배출하였다.
문과(8명)
이광도(李廣道) 이근(李根) 이승헌(李承憲) 이우규(李羽逵) 이유민(李裕民) 이재석(李在祏) 이정호(李挺豪) 이진석(李晉錫)
무과(16명)
이규년(李奎年) 이빈(李䎙) 이수남(李守男) 이애남(李愛男) 이억봉(李億奉) 이언방(李彦邦) 이영규(李榮逵) 이유(李有) 이인귀(李麟貴) 이준연(李俊沿) 이중로(李重老) 이천빈(李天彬) 이태수(李台壽) 이해룡(李海龍) 이해빈(李海賓) 이해용(李海容)
생원시(8명)
이경태(李慶泰) 이문준(李文俊) 이성규(李星逵) 이승은(李承恩) 이재혁(李在爀) 이주석(李柱錫) 이청(李淸) 이항(李𦐄)
진사시(10명)
이광도(李廣道) 이면술(李冕述) 이성년(李聖年) 이원성(李元性) 이인기(李麟奇) 이정석(李貞錫) 이정호(李梃豪) 이주성(李胄性) 이학년(李鶴年) 이홍규(李鴻逵)
15. 공 • 충신록(功 • 忠臣錄)
1) 증 보조공신 영의정 청해부원군 휘 아원 시조 청해백 이지란의 부
2) 청해백 양렬공 諱 之蘭(지란)
조선개국일등공신 위화도회군 일등공신 정사이등공신 좌명삼등공신
明朝 封 청해백 대강보국승록대부
조선조 책 수충분의익찬경운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 문하시중찬성사 동판도평의사겸판 형조사판의홍삼군부도절제사, 익양렬공, 배향 태조묘정
3) 청해군 추밀공 諱 和尙(화상)-청해백의 장자
원종공신 조선조 보국숭록대부판공조사, 明朝 에부상서겸 추밀부사
라. 청해군 무후공 諱 和英(화영)-청해백의 차자
원종공신 보국숭록대부판도총제부사의홍삼군부사 겸 판형조사
마. 충신통훈대부 창렬공 諱 希唐(희당)-청해백의 7세손, 추밀공의 6세손
동부주부(東府主簿), 동관진첨사, 임란 시 전사 증 훈련원왕
바. 청릉군 송계공 諱 麟奇(인기)-重老의 父-청해백의 7세손
가평군수, 거선대부 제수, 좌찬성 추증, 청릉군 추봉
사. 청흥군 충장공 諱 重老(중로)-麟奇의 3子, 청해백의 8세손
이천부사, 경기강원양도좌방어사, 이괄의 난 평정 시 전사
정사공신 증 좌의정 청흥부원군 추서, 병조판서 추증, 숭정대부 좌찬성 추증
판의금 부사 추존, 오위도총부 도총관 추증
아. 영국공신 諱 희당-청해백의 장자 추밀공의 3子 효적의 5세손
경원부사, 증 훈련원장(임진왜란 순절 창렬공 창렬사에 배향)
자. 갑란원종공신 선약공 諱 성남-청해백의 10세손, 추밀공 4子 효장의 8세손
宣略將軍(선략장군-종4품 무신)
차. 임란원종공신 諱 호정-청해백의 10세손, 추밀공 4子 효장의 8세손
司僕僉正(사복첨정-종4품)
카. 임란원종공신 諱 호걸-청해백의 10세손, 추밀공 4子 효장의 8세손, 호정의 弟
司僕僉正(사복첨정-종4품)
타. 영국공신 諱 삼립-청해백의 장자 추밀공의 3子 효적의 6세손, 희당의 3子
조봉대부 동몽교관(증직)
파. 단사공신 諱 문주-麟奇의 孫 청해백의 9세손
司僕僉正(사복첨정-종4품), 증 병조참판
하. 영국종훈 휘 창남-청해백의 9세손, 무후공 6子 효강의 7세손
근 • 현대
1. 李氣乙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경영학 박사 연세대학교 교수
2. 李氣鎭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한국신문예협회장. 시인
3. 李氣亨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서울고등검찰청 부장검사
4. 李氣鴻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국방대학원 농림부 양정국장
5. 李大鎬 : 추밀공 세번.세온파 양덕문중 한국은행부장 제4대 대종회 회장
6. 李明遇 : 추밀공 세번.세온파 양덕문중 경영학박사 명지전문대학 경영과 교수, 평안남도지사, 이북5도위원장 제25대 현 대종회회장
7. 李芳遇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강릉지방 변호사
8. 李範性 : 충장공 병사공파 강화문중 공학박사 인하대학교 학장 제6대 대종회장
9. 李 實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연대상대 삼성물산 임원
10. 李榮純 : 추밀공 세번. 세온파 양덕문중 서울대학교 수의과 대학장, 식약청장, 대한민국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학술원 의학분과위원장, 제18,19대 대종회 회장
11. 李榮鎬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치의학 박사 치과병원장
12. 李完性 : 무후공 독정문중 국세청에 근무 제21대 대종회 회장
13 李 乙 : 추밀공 세번. 세온파 양덕문중, 동아일보주필, 조선일보 부사장, 초대회장
14. 李仁甲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육군 소장
15. 李仁哲 : 의학박사 산부인과 병원장
16. 李壹球 : 추밀공 세번. 세온파 양덕문중 이학박사 건국대교수, 제11대 대종회 회장
17. 李一昺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일리노이대학교 공학박사 연세대학교 교수
18. 李章鎬 : 추밀공 숭노공파 북청문중 철학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19. 李在玉 : 추밀공 승노공파 북청문중 광주고등법원장 제3대 대종회 회장
20. 李在夏 : 추밀공 승노공파 북청문중 남부순복음교회 목사
21. 李仲鎬 : 추밀공 승노공파 북청문중 서울신문사 부장
22. 李正勳 : 추밀공 승노무공파 북청문중 경영학박사 한국생산성본부 전문위원
23. 李昌福 : 추밀공 세번. 세온파 양덕문중 농학박사 서울농대 교수 제9대 대종회 회장
24. 李春性 : 충장공 병사공파 강화문중 조흥은행 상무이사 제2대 대종회 회장
25. 李 赫 : 연대치의대 치의학 박사 치과병원장
26. 李洪執 : 무후공 찬성공보령파 문중 행정학 석사, 충남해양수산과장, 충남 보령시 부시장, 제24대 대종회 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