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해이씨
시조와 연원
시조 청해백 이지란
청해이씨 시조이신 청해백 이지란 할아버님은 고려 충혜왕 원년인 신미년(서기 1331년)에 함경북도 북청(당시 청해라 함)에서 太白星(태백성)의 정기와 長白山(장백산)의 영기를 타고 중국 남송 무목왕 岳飛將軍(악비장군)의 6세손 아원(아라부카)의 장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청해(靑海). 초성은 퉁(佟),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이며 자는 식형(式馨)이다. 아버지 아원(아라부카)은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란 벼슬에 올랐다.
젊은 시절부터 이성계와 친교를 맺고 의기투합하여 결의 형제를 맺어 이성계를 도와 이씨조선 창건에 큰 역할을 하였다. 첫째 부인은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 혜안택주(惠安宅主) 윤씨(尹氏)이며, 둘째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조카딸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강씨(谷山康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여진의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사받았다.


서기 1380년(우왕 6)
이성계의 편장으로서 황산에서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이끄는 왜구를 무찔렀으며(황산대첩), 1385년 이성계의 휘하로 왜구를 함주에서 격파해 선력좌명공신(宣力佐命功臣)에 봉해지고 밀직부사에 임명되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에 참가해 1390년(공양왕 2) 밀직사가 되었다.
같은 해 서해도에서 왜구를 격파해 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司事)·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에 임명되었다. 1392년 명나라를 도와 건주위(建州衛) 여진추장 월로티무르[月魯帖木兒]의 반란을 정벌한 공으로 명나라에 의해 청해백(靑海伯)에 봉해졌다.
이성계를 추대한 공훈으로 1392년(태조 1)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에 오르고, 보조좌명개국일등공신(補祚佐命開國一等功臣) 청해군(靑海君)에 봉해졌다. 1393년 경상도절제사로 왜구 방어를 담당했고, 이어 동북면도안무사가 되어 갑주·공주(孔州)의 성을 축조하였다. 또, 위화도의 회군에 참가한 공훈으로 회군일등공신(回軍一等功臣)에 봉해졌다. 1393년 동북면도안무사, 1397년 동북면도병마사, 1398년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郎贊成事)·판형조사의흥삼군부사중군절제사(判刑曹事義興三軍府事中軍節制使)가 되었다.
같은 해 제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워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봉해지고,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공을 세워 1401년(태종 1) 익대좌명공신(翊戴佐命功臣) 3등에 봉해졌다. 태조가 왕위에서 물러나자 고향인 청해(靑海: 北靑)에 은거하면서 남정·북벌에서 많은 살상을 한 것을 크게 뉘우쳐 불교에 귀의했다. 태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묘소는 함경남도 북청군 신북청읍 안곡리에 있다. 시호는 양렬(襄烈)이다. 슬하에 和尙, 和英, 和美, 和秀 네 아들을 두었다.
본관 북청
청해이씨 본관인 북청은 원래 고구려의 땅이었으나 여진이 오랫동안 점령하였었다. 睿宗(예종) 2년에 윤관을 보내어 여진을 몰아내고 이홉 城을 두어 방비하다가 원나라에 빼앗기어 三撤(삼철)이라 불렀고 공민왕 5년(1356)에 다시 수복하여 안북천호방어소를 두었다가 공민왕 21년(1372)에 靑州로 개칭하고 안무사겸 만호를 두었다. 조선에 들어와태조 7년(1398)에 靑州府로 개칭하였으나 태종 17년(1416)에 淸州牧과 音이 같다 하여 北靑(아마도 북쪽에 있는 청주란 의미였을 것으로 추론됨)이라 하였고 세종 9년(1427)에 도호부를 두어 東으로는 이성현까지 68里, 南으로는 함흥부까지 80리, 西로는 함경도 홍원현까지 56리, 北으로는 갑산부까지 180리 경성까지는 1083리이다. 이와같이 역대에 따라 邑名이 개칭되어 혹은 三撤이라하고, 혹은 靑州라 하고 혹은 安北이라고 하고 혹은 靑海라고 하였는 바 이 모두 北靑의 옛 이름이다.


靑海李氏 元祖 岳飛(청해이씨 원조 악비)
岳飛(악비) AD1103-AD1141
악비의 다섯째 아드님인 岳霆(악정)은 악비 장군 제2 부인인 고려인 이충일의 딸 이씨 부인의 유복자로 악비 장군이 진회 일당의 무고에 의해 죽임을 당한 후에 여진족 땅인 영고탑(현재 헤이룽장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시(寧安))에서 출생하였다.
이후 岳霆(악정)의 후손들은 4대에 걸쳐 여진인과 같이 살았으며 악비 장군의 6세손인 아원의 아들이 청해이씨 시조 이지란 할아버지다.
악비 장군은 정강의 변 이후 ‘악가군’이라는 대군벌을 이루어 금나라의 침공을 저지하는 등 많은 무훈을 세웠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하는 재상 진회 등 현실파와의 대립으로 투옥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후에 누명을 풀고 구국 영웅으로 추대되었다.
중국인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민족 영웅으로 남송 최후의 재상 문천상(文天祥), 촉한의 제갈량과 함께 충절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악비 장군은 1103년 지금의 하남성 탕음현(湯陰縣) 정강촌(程崗村)의 가난한 농노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자는 붕거(鵬擧), 이름은 비(飛)다. 그가 태어나던 날 고니같이 생긴 새가 그의 집 지붕 위에서 울다가 날아갔다 하여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어린 시절부터 독서를 좋아하여 책의 종류를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악비는 《좌씨춘추(左氏春秋)》와 《손자병법》을 통해 유학과 병법을 익혔다. 특히 병법에 관심이 많아 진광(陳廣)에게서 창술과 검술을 배웠고, 성인이 된 후에는 주동(周同)에게 궁술을 배웠다.
악비는 1122년 조정에서 군사를 모집할 때 응시하여 진정부로(眞定府路) 선무사(宣撫司)의 소대장이 되었다. 그러나 1122년 부친 악화가 세상을 뜨자 군대를 떠났다가 2년 후에 다시 입대했다. 재입대할 때 어머니 요부인이 ‘충성을 다해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로 ‘진충보국(盡忠報國)’이라는 네 글자를 악비 장군의 등에 새겨 주었다고 한다.
악비가 살던 당시 송나라는 국운이 매우 기울어 있는 데다 제8대 황제 휘종의 무능으로 인해 국내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그러나 송이 쇠퇴 일로를 걷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동북방에서는 여진족이 1115년 금나라를 건립하여 점차 세력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송은 금과 협력하고 과거에 잃었던 땅을 회복하기 위해 요(遼)를 공격했고, 마침내 1125년 요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곧 금과의 협력 조건을 이행하지 않아 곧 금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금이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자 휘종은 흠종에게 양위하고 태상황이 되어 남쪽으로 피신했다. 곧 금의 군대가 송의 수도 개봉을 포위했다. 흠종은 이강(李綱)을 등용하여 방어했지만, 결국 금을 물리치지 못하고 배상금과 영토 할양의 조건으로 화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송은 또다시 화약 조건을 이행하지 않았고, 금은 이를 빌미로 공격을 시작하여 1126년 개봉을 함락했다.
개봉을 함락한 금은 송의 대신 장방창(張邦昌)에게 점령한 지역을 다스리게 하고 흠종을 포로로 잡아 북으로 철군했다. 이것이 ‘정강의 변’이다. 하지만 이로써 송나라가 완전히 멸망한 것은 아니었다. 1127년 휘종의 아홉째 아들 조구(趙構)가 강남으로 피신하여 임안(臨安)에서 송나라를 재건하고 고종으로 즉위했다. 이를 기점으로 1126년 이전 시기를 북송, 1127년 이후 시기를 남송 시대라고 한다.
악비는 이 시기 금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공을 세웠고, 정강의 변 이후 우한(武漢)과 양양(襄陽)을 거점으로 하는 호북성 일대의 대군벌이 되었다. 1127년 고종을 따라 남하한 그는 고종에게 남하를 멈추고 친히 6군을 이끌어 금나라를 몰아내고 중원을 회복하자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이 일로 그는 고종의 분노를 사 군에서 파면되었다. 하지만 고종이 주전파(主戰派) 관료를 등용하고 군대를 재정비하는 등 금나라에 대항하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자 금나라는 남침을 감행했고, 악비는 그해에 다시 복직되었다.
금나라는 여러 차례 남침을 시도했지만 관군과 연계한 각지의 의병들 때문에 번번이 공격에 실패했다. 이에 금나라는 1130년 괴뢰 정부인 제(齊)를 세워 송의 대신이던 유예(劉豫)를 황제로 옹립하고 남송을 공격했다. 악비는 1130년 건강부(建康府) 탈환을 시작으로 1134년에는 6개의 주를 수복하는 전과를 올렸다. 남송의 완강한 저항과 남송의 주화파 관료들의 설득으로 결국 금나라는 제가 다스렸던 영토를 돌려주는 대신 세금을 받는 선에서 타협했다.
남송은 금나라와의 관계는 일시적으로 회복했으나 내부적으로 도적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는 등 사회가 매우 혼란스러웠다. 악비는 1130년 도주(道州)와 하주(賀州) 등지에서 할거하던 도적 무리들을 토벌하여 불안을 해소시켰다. 악비는 그 전공을 인정받아 고종으로부터 ‘정충악비(精忠岳飛)’라는 깃발을 하사받았다. 이후 ‘정충’은 오늘날 악비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다. 악비는 도적 무리들을 무조건 토벌하지 않고 군인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는 군율을 엄격히 하는 한편 군사들을 식구처럼 보살피는 행동으로 군기를 잡았다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악비의 군대를 ‘악가군(岳家軍)’이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그러나 금나라와의 화친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140년 금나라의 정권을 잡은 올출(兀朮)이 남침을 강행했다. 악비는 부장 왕귀(王貴), 우고(牛皐), 양재흥(楊再興)을 보내 적군의 남진을 막고, 의병대장 양흥(梁興)을 보내 적군의 후방을 공격했다. 악비 자신은 언성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악비의 세 부장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고, 악비의 군대는 주선진(朱仙鎭)에 주둔한 채 금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남송 조정은 악비에게 회군 명령을 내렸고, 악비는 어쩔 수 없이 1141년 남송의 수도인 임안부로 귀환했다.
1140년 남침을 강행한 올출은 악비 등의 선전으로 성과를 얻지 못하자 남송에 화의를 제안했다. 악비 같은 주전파 군벌들의 연이은 공으로 입지가 좁아진 주화파는 재상 진회(秦檜)를 중심으로 올출의 화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진회는 임안부로 돌아온 악비를 추밀부사에 임명하여 병권을 회수한 후, 감찰어사 만사설(萬俟卨)에게 악비를 모함하는 상소를 올리게 하여 결국 악비가 사직하도록 했다. 다음으로 진회는 악비의 부장인 왕귀와 왕준(王俊)을 사주하여 악비의 다른 부장 장헌(張憲)이 악비의 아들 악운(岳雲)과 함께 병변을 일으켰다고 참소하도록 했다.
이리하여 장헌과 악운은 물론 악비까지 투옥되었다. 심문을 받으면서 악비는 자신의 등에 새겨진 ‘진충보국’ 문신을 내보이며 결백을 주장했고, 심문관도 악비의 죄를 입증할 증거를 찾지 못했다. 이때 남송의 명장 한세충(韓世忠)이 진회에게 악비의 죄를 따져 물었다. 이에 진회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지만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莫須有).”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결국 악비는 사형에 처해져 1142년 겨울 서른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참수되었다.
악비가 이처럼 쉽게 처형된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컸다. 당시 남송은 악비 중심의 주전파와 진회 중심의 주화파가 대립했고, 고종은 현실적으로 북벌이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고종은 주전파의 주장인 ‘중원 회복과 휘종과 흠종의 복귀’를 쉽게 받아들일 입장이 아니었다. 북벌이 완성되면 고종은 휘종이나 흠종에게 황위를 내놓아야 할 상황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주화파를 지지할 수밖에 없던 고종에게도 악비의 숙청은 필요했던 것이다.
악비는 오늘날 중국인들에게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지만, 악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의 인생만큼 곡절을 겪었다. 악비는 1162년 고종이 승하한 후 효종이 즉위하면서 복권되었고, 백성들은 악비를 구국의 영웅으로 받들었다. 남송 조정은 악비에게 무목(武穆), 충무(忠武)의 시호를 내리고, 악왕묘라는 사당을 지어 악비를 추모하는 등 크게 추앙했다. 하지만 1271년 몽골 족의 원나라가 건국되면서부터 악비 다시 경시되었다. 이런 풍조는 한족이 중원을 회복한 명나라 시대에 사라졌지만, 1616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들어선 이후 다시 살아났다.
한편 1894년 중국이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후 악비를 숭배하는 분위기는 다시 고조되었고, 1931년 일본군에게 동북 지역을 점령당했을 때는 민족 영웅으로까지 칭송받았다.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은 한족이 다스렸던 기간뿐만 아니라 비한족의 통치 기간도 중국 역사에 포함한다는 개념에서 2002년 “악비는 외국 침략에 대항한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민족 영웅이라 할 수 없다.”라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청해이씨 시조 이지란 선조에 대한의 악비세계 기록
중국 문헌인 <宋時古今萬姓統譜岳氏世系>중 악비의 5子인 정(霆)에 관련 사항 발췌
[霆飛子雲雷與難霖臨陳亡震霆潛住黃梅故鄕賢舊祀有曰忠臣岳震然飛死於高宗紹興十一年至二十五年乙亥上距辛酉十五年載矣檜宿恨猶存惡岳州與飛同姓改爲純洲子孫亦不敢以岳爲氏孝宗登極顎錄與恩者祇原徒嶺南雲雷支裔而此派不及至追贈忠武岳王震霆子孫在梅地者悉從顎姓入金析爲顎家云元爲長水烏梅村子雨從俗爲母姓地爲女眞所據云] [정(霆)은 비(飛)의 다섯째 아들이다. 운(雲)과 뢰(雷)는 모두 난(難)에 참여하였고 림(霖)은 전쟁에서 죽고 진(震)과 정(霆)은 황매촌(黃梅村)에서 숨어 살았다. 그리하여 그곳 사람들은 충신 악진(岳震)을 오래 제사 지냈다. 그러나 악비(岳飛)는 고종 소흥 11년 신유년에 죽고 그로부터 15년을 지나서 소흥 25년 을해년에 진회(晉檜)가 그때까지 악비에 대한 원한을 풀지 않고 증오한 나머지 악주(岳州)가 악자(岳字)의 성자(姓字)와 같다는 이유로 악주(岳州)를 순주(純洲)로 고쳐서 부르게 되므로 그 자손이 감히 악씨(岳氏)로 행세하지 못하였다, 효종이 황제가 된 뒤에 뢰(雷)의 자손인 악록(顎錄)이란 분은 평소에 은덕을 입은 기원(祇原)이란 사람을 쫓아서 영남으로 옮기면서 그 자손은 그곳에서 살고 운.림(雲.霖)의 자손은 없고 황매촌(黃梅村)에서 살던 진(震)과 정(霆)의 자손은 모두 악씨성(顎氏姓)으로 행세하였다. 황매촌(黃梅村)은 원(元)나라 때에 장수오매촌이 되었고 정(霆)의 아들 우(雨)가 그곳 풍속을 쫓아서 어머니 성(姓)을 따르게 된 것이며 오매촌은 그때부터 여진땅이 되었다고 한다]
岳飛家史考 第2冊 第10章
岳飛5子岳霆朝鮮后裔考
중국 악비가의 족보격인 악비가사고 제2책 제10장에 한국의 악비후예 가문인 청해이씨에 대한 이야기와 평남 양덕군에 터를 잡은 청해이씨 7세 世蕃(세번)의 가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는 양덕군 출신 20세손 陽鎬(부산태종사 주지 도성스님)가 대북시 악씨종친회총간사인 악ㅇ운에게 한국의 청해이씨가 악비의 5자인 霆의 후손임을 설명하고 이를 인정하여 악비가사고에 청해이씨에 대한 내력과 양호의 가계를 게재하게 되었다.
개략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평안도 양덕군과 함남 북청군 등지에 천 2백여호 정도의 악비 후예가 산거(흩어져 살고 있다)하고 있으며 이들은 악비의 5子 악정의 6세손 악지란이 고려 공민왕 20년(1371년)에 고려에 귀화해 이지란으로 개명하여 살았다. <황성통보> 고증에 의하면 중국 남송 충신 명장 악비는 진회의 모함을 받아 5자인 악정이 난을 피하여 함남 삼수(황해촌)에 들어가 살았다. 이양호 선생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岳飛-霆-雨-浮海-阿甫-雅遠(아라부카)-之蘭-和尙-在壓-体-允奇-世蕃-談-彦春-忠那-琪秀-森得-昌彬-壓恒-云澄-致敬-正碩-世珍-実煥-秉律-陽鎬
